'파비트라 대 여제' 18화. | 신대륙의 인물들

2014-09-24 09:21 | 조회 15622








악조건을 감수하며 남방 원정을 강행해야 할까, 좀 더 기다려봐야 할까? 파비트라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나쁜 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베난이 죽은 다할의 자식을 찾아내어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짓을 하는 의도는 뻔했다. 지금은 새로운 제국을 세운 양 떠들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하리하랄라야의 황위라는 뜻이었다. 그런 식으로 제국이 분열에 휘말리면 제국의 서쪽 끝인 오스테라로의 원정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원정을 말렸다. 당장 제국으로 쳐들어올 여력도 없는 자들을 정벌하려고 출진하기에는 이득보다 손해가 크니 저쪽에서 제풀에 무너지거나 무슨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답답함 때문에 파비트라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해쓱해져가자 우려의 목소리가 퍼져갔다. 마침내 알키미가 파비트라 앞에 나서서 아뢰었다.

 

“폐하. 신은 비록 실제로 다스린 적은 없으나 남방의 이슈바라이옵니다. 제게 군대를 내리시어 반역자의 무리를 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시어 향후 오스테라를 정벌하심이 옳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알키미는 그의 말대로 남방의 유일한 이슈바라(군주)였으며 아므르타 출신이기도 했으니 책임감을 느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알키미의 뛰어난 무예나 황태자를 살려 돌아온 능력, 그리고 충직함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으나 그는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임무에는 오랫동안 연의군을 지휘해 온 데다 매번 승리를 거둬 온 나디르가 적임이었다. 파비트라는 나디르를 함께 보내고 싶어했지만, 나디르는 남방 원정이 성공하기 어렵다며 오히려 출군을 반대했다.

 

나디르는 과거 이스밀과 함께 아므르타에서 군대를 키워 본 경험이 있었다. 서방 출신인 그에게는 남방의 북쪽 끝에 위치한 아므르타조차도 겨우 견뎌낼 만한 날씨였다. 새로 생겼다는 베난의 제국은 그보다 남쪽이라는데 그런 황무지며 사막에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있겠는가? 아니, 사람인들 있겠는가? 이름만 제국일 뿐 사실상 원주민 부락 몇 개로 이뤄져 나라라고도 하기 힘든 곳일 게 뻔하다는 것이 나디르의 생각이었다.

또한 원정군이 간들 지옥 같이 덥고 질척거리는 땅에서 제대로 된 전투인들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디르의 생각이 그러하자 상비군의 주력을 이루는 연의군 출신 지휘관 및 병사들의 생각도 나디르 쪽으로 기울어졌다. 남방 원정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할 분위기였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황제의 뜻임이 알려지자 그 다음부터는 아므르타에 미리 군을 주둔시키고 기다리는 편이 나은가, 상대가 군사를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은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전자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동안 군대 유지비용이 들 테고, 후자는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 둘 다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가장 나은 수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상대국으로 먼저 쳐들어가는 것이었지만 패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신하들은 모두 그 주장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신하들이 토론으로 세월을 보내며 눈치를 보는 동안 알키미가 다시 한 번 나서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마침내 파비트라는 눈을 꾹 감고 그의 주청을 윤허했다. 그에게 3만의 군대를 주고 참모로 류이진의 둘째 아들 나밀을 데려가게 했다.

나밀은 영리하기로 이름난 젊은이였지만 전쟁은 물론 정무 경험조차 없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거리를 떠도는 한량에 가까웠다. 그런 것조차 아버지 류이진이 젊었을 때와 똑같았다.

비록 말석 참모였지만 나밀은 여제의 명을 받들면서 한 가지만 허락해 달라고 했다. 막냇동생 제니리를 데려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니리는 고작 열다섯 살 먹은 소녀였기에 파비트라는 몹시 의아했다. 하지만 나밀은 웃으면서제니리가 있어야 내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답했다. 결국 제니리는 병사들까지 통틀어 전 군 최연소로 남방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분도 애매해서 참모 보좌관이라는 괴이한 직책을 만들어야 했다.

원정군이 출군하는 날, 군복을 줄여 입고 나타난 제니리는 작은 체구에 발랄한 것이 영락없는 그 또래 소녀였다. 삼촌뻘, 아버지뻘 군인들로 둘러싸여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는 면이 그나마 칭찬할 점이긴 했지만 파비트라는 못내 불안한 심정이었다. 공을 세우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제니리의 존재가 군대의 기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알키미가 이끄는 남방 원정군 가운데 핵심은 연의군 출신이었다. 연의군은 그간 승전을 거듭해 온 터라 콧대가 높았고, 이번 원정을 놓고 나디르와 날카롭게 대립해 온 알키미에 대한 충성심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 점은 행군을 시작한 지 닷새도 되지 않아 뚜렷이 드러났다.

알키미는 본인이 충직한 성품이라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 다들 따르리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파비트라가 유연한 나밀을 곁에 붙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밀은 군대 내 여론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군대를 편성할 때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석구석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찍이 류이진이 그랬듯 연 가문 출신들이 기본적으로 익히는 재주였다.

아므르타까지 사흘 정도 남은 날 저녁, 나밀이 막사에 마주 앉아 낙서를 하고 있는 제니리에게 말했다.

 

“한 번쯤 놀래줄 때가 됐지?”

 

“오빠가 준비는 잘 했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말고.”

 

“아므르타가 낫다 그거야? 효과는 크겠지만 일도 커질 텐데.”

 

제니리가 양 뺨을 동그랗게 하며 웃었다. 갈래머리를 묶은 소녀여도 입에서 나오는 건 연 가문 출신의 성격 그대로였다.

 

“콧대 높은 자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절감해 봐야 정신 차리잖아.”

 

사흘 뒤, 아므르타 근처에 다다른 원정군은 먼저 간 척후가 아므르타가 폐쇄됐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크게 놀랐다. 벌써 베난의 군대가 움직였단 말인가?

그런데 아므르타에서는 아무 깃발도 오르지 않았고 단지 폐쇄만 된 터라 내부의 상황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편지를 묶은 화살을 날려도 아무 답이 없었다. 아므르타를 지키고 있던 군대는 보잘것없었으므로 베난의 군대에게 이미 점령당했으리라는 예상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대군이 아므르타를 점령했다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동시에 베난 군이 오지 않았다면 답이 없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밀이 알키미에게 나아가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연의군 소수 정예만으로 아므르타 북쪽 성문 앞을 경계하게 하고 본진은 남쪽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베난의 선발대가 아므르타를 차지했거나, 적어도 진군 중이어서 아므르타가 폐쇄된 것이라면 남쪽에서 적군이 다가오리라는 예상은 옳았다. 또한 아므르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뿐이라면 당장 교전을 벌여서는 곤란했다.

 

알키미가 나밀의 조언대로 군대를 배치하자 본대에서 떨어져 저들끼리 있게 된 연의군은 공을 세워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졌다. 그래서 포위한 채 경계만 하라던 명령을 어기고 아므르타 성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므르타에서는 당연히 농성전으로 응수했다.

양측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그 과정에서 아므르타가 베난 군에게 점령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아므르타 사람들은 화가 나서 상대가 황제가 보낸 원정군임을 알고도 문을 열지 않았다.

 

교전 사실이 알키미에게 알려진 것은 이튿날이 되어서였다. 알키미의 본대는 남쪽으로 상당히 내려가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

알키미는 크게 화가 났다. 아므르타는 그의 고향이었다. 그런 곳에서 명령을 어기고 교전을 벌여 사람들을 죽인 데다 덕택에 악감정마저 샀다. 알키미가 다시 아므르타로 돌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 사람들에게 이번 교전은 사고였을 뿐이니 이런 일로 황제에게 반역하지 말고 문을 열라고 호소하고서야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지휘관이 알키미였기에 쉽게 해결된 셈이었다. 죄를 지은 연의군은 그 광경을 불편한 심경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아므르타로 들어간 뒤 알아보니 아므르타 사람들은 베난의 군대가 용의 수호를 받아 저주를 내린다는 소문이 돌아 그걸 막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든 성문을 폐쇄했던 것이었다.

아므르타가 교전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로 약속하고 피해자들을 위한 제례를 치른 뒤 알키미는 알키미는 연의군을 크게 벌할 생각이었다. 그때 다시 나밀이 나서서 이번 일은 착오일 뿐이니 연의군의 오만함을 질책하고 반성하게 하는 선에서 그치는 편이 전군의 사기를 위해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연의군은 알키미의 관대한 처분을 받자 스스로를 더욱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연의군이 본래 정예군이기에 가능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 결과 원정군 내의 불화 요소는 사라졌다. 알키미의 권위는 오르고 연의군은 총대장을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연 가문 남매가 꾸민 계략이었다.

그걸 위해 아므르타 사람들과 연의군 일부가 희생되었다. 나밀과 제니리도 이렇게 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둬도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이 불화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가올 베난 군과의 싸움에서 패하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계산을 냉혹하게 해내는 것은 류이진의 아이들다운 자질이었지만 동시에 알키미 같은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는 절대로 이해 못할 부분이었다. 남매도 그걸 알았기에 이런 큰일을 벌이면서 알키미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렇듯 어찌 보면 대담하고, 어찌 보면 전쟁조차 장기 놀이처럼 생각하는 남매의 손에서 남방 원정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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