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모스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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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정보

소모 노동력 : 25
필요 숙련 : 없음
제작대 : 인쇄기

원고 획득 정보


내용

#1

누구에게나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의 황금기가 존재한다. 하루하루가 행복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이 시기는 신이 누이안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이 인생의 황금기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자에게는 이 황금기가 매우 길게 느껴질 것이며, 지나친 욕심 때문에 그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이에게는 이 황금기가 찰나의 순간처럼 짧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처럼 여겨질 것이다.

#2

생명의 촛불이 끝까지 다 타들어 가 심지의 끝자락에 다다른 노년에 이르러 문득, 서쪽 하늘의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의 황금기를 추억해 본다.
그때는 그 시기가 자신의 삶에서 황금기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아내 안젤리나와 함께 신혼 생활을 누리던 때가 내 삶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자주 싸우기도 했고, 안젤리나의 형편 없는 음식 솜씨 덕분에 식중독과 소화불량에 자주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때이다.

#3

아, 안젤리나…
나를 가장 사랑했지만, 결국 배신의 쓴맛을 안겨줬던 그녀…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 배신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지만, 결국 내 일생을 회한에 젖어들게 한 그녀.
내 행복의 시작이 그녀를 만나면서 시작된 것이라면, 불행 역시 그녀 때문에 시작되었다.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면 저승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4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작스럽게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내왔던 안젤리나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녀가 내게 남긴 편지를 지금에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뒤모스에게'라고 쓰여 있는 이 편지의 붉은색 밀랍 봉인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밀랍봉인에 '이즈나 선박조합'을 의미하는 범선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내가 이즈나 선박조합에서 장인으로 일했을 때, 지니고 있던 밀랍 봉인 도장의 문양이다. 그녀가 나를 배신하기 전에 나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시절에 몰래 남겼던 편지 같다. 무려 반세기 전에 쓰인 편지가 젊은시절 사용했던 일기장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지금에서야 발견하게 됐다. 그 사건이 있었던 뒤로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5

안젤리나가 남긴 편지를 뜯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나버린 세월에 대한 분노와 아픔 그리고 회한이 내 손길을 가로막고 있다. 반세기란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이 편지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이 편지를 읽지 않는다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희석된 그녀의 모습만이 기억에 간직된 상태라 편한 마음으로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지금에 와서 이 편지를 읽고 분노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반세기가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지나간 세월의 단편을 떠올리게 해줄 편지를 뜯어서 읽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6

편지를 뜯어보기에 앞서 옛일을 떠올리며 펜을 긁적여 본다.
안젤리나의 편지를 읽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편지를 읽을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을 누군가가 읽길 바라며 적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얼간이 항해사 카모르 녀석 정도가 내 흔적을 불사르기 전에 내가 남긴 물건을 살피다 이 회고록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카모르는 까막눈이라 안심이다. 만약 글을 아는 녀석이 내가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간 뒤에 내 물건을 정리한다면 찝찝한 마음 때문에 회고록을 이렇게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모르의 무지가 답답하게 여겨질 때가 많았는데, 이번 한 번만은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7

스물여섯 살의 나는 이즈나 선박조합의 일급 장인으로 일하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이즈나 선박조합의 일급 장인의 평균 연령이 서른 후반 정도인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빠르게 일급 장인이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빨리 선박조합의 일급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플라디우스 스승님 덕분이다. 이즈나 선박조합의 특급 장인이자 부조합장이었던 스승님은, 내가 막 조합의 도제가 되었을 때 나를 조수를 고용했다.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스승님은 나를 좋게 보고 후견인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스승님의 외동딸인 안젤리나가 내 아내가 되면서 나는 스승님의 후계자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스승님이 누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가신 후,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이즈나 선박 조합의 일급 장인 겸, 부조합장이라는 직함까지 얻게 됐다.

#8

이즈나 선박조합은 노동자들이 모인 단체치고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이었다. 덕분에 나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었다. 안젤리나와 나는 결혼 육 년 차였는데도 불구하고 신혼부부처럼 생활했다. 그녀가 임신하지 못해 아이가 없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임신을 강요하지 않고, 항상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 우리가 신혼부부처럼 생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안젤리나는 임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며 내게 미안함을 느끼곤 했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안은 후 등허리를 토닥여 줬다. "아이는 없어도 괜찮아. 나한텐 당신이 전부니까."

#9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가 하도 생기지 않아 사제 오르도스를 찾아갔을 때, 오르도스가 내 몸을 살펴본 후 씨 없는 수박에선 영원히 새로운 생명이 잉태될 수 없다며 혀를 찼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안젤리나 때문이 아닌, 나 자신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평소보다 더 안젤리나를 아끼며 사랑해줬다. 그렇지만, 안젤리나에게 내가 씨 없는 수박이라는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나를 원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과 지금 상태에서 내가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줄수록 우리 사이가 더 애틋하게 오래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0

우리의 행복에 금이 가게 된 것은, 이즈나 해군 사령부의 신임 제독으로 부임한 시카리오스 때문이었다.
시카리오스는 어린 시절 안젤리나의 소꿉친구였는데, 안젤리나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해 이즈나 왕가의 첫째 왕자인 파로스 왕자가 이끄는 으르렁거리는 해적섬 정벌군과 함께 으르렁거리는 섬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소식이 끊기게 됐다. 무려 팔 년 동안 소식이 끊긴 상태였던 지라 안젤리나와 스승님은 그가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저승의 강은 건너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나타났다.

#11

파로스 왕자가 이끄는 으르렁거리는 섬 원정대는 이지 여신께 미움을 사기라도 했는지 으르렁거리는 섬에 도착해보지도 못한 채 고요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대부분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단 여섯 명만이 십 년 만에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시카리오스였다. 시카리오스는 으르렁거리는 섬 원정대가 풍랑을 만나 전멸에 가까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용감하게 파로스 왕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곤, 무려 팔 년 동안이나 파로스 왕자를 충성스럽게 모셨다고 한다.

#12

파로스 왕자와 시카리오스가 난파된 무인도에는 처음에 생존자가 약 삼백여 명가량 있었는데, 군의 위계질서가 사라지면서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게 됐다고 한다. 일부는 군의 질서를 존중해 왕자를 보호했는데, 시카리오스는 그 무리에 있었다고 한다. 무인도에서의 생활이 길어지자 물과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됐다.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었으며, 그 잔인한 상황에서 점점 기존의 신분질서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늘어나게 됐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강자들의 틈에 껴서 생존을 보장받으려 할 때도 시카리오스는 우직하게도 짐 덩어리에 불과한 파로스 왕자를 모셨다고 한다.

#13

시카리오스와 파로스 왕자가 다른 생존자들과 삼 년 동안 치열하게 전쟁 아닌 전쟁을 벌여 살아남았을 때, 그들은 본래 자신들이 정벌하려 했던 으르렁거리는 섬의 해적들에 의해 구조됐다고 한다. 해적들은 그들을 구해 노예로 부려 먹었는데, 노예 처지가 된 생존자 중 일부가 파로스 왕자의 존재를 해적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먼저 눈치챈 시카리오스가 살아 있는 생존자들에게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용의주도한 시카리오스는 자신과 왕자 그리고 함께 왕자를 모시는 일부 병사들에게는 배탈이 날 정도의 약을 먹게 해서 해적들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해적 섬에서 오 년 동안 왕자의 존재를 숨긴 채 노예 생활을 해오다가 빈틈이 생겼을 때, 왕자와 함께 탈출을 감행해 이즈나로 귀환한 것이다.

#14

말단 병사로 으르렁거리는 섬 원정대에 참여했던 시카리오스는 파로스 왕자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해군 장교가 된 후, 불과 이 년 만에 이즈나 해군을 이끄는 제독이 되었다. 이즈나 왕가에선 시카리오스를 충성스러운 신하의 표본이라며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덕분에 그는 이즈나 왕가뿐만 아니라, 이즈나 왕성의 모든 시민이 선망하는 젊은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스물여섯의 젊은 해군 제독은 수많은 여성의 구애를 받았는데, 그는 어느 여성과도 함께하지 않았다. 당혹스럽게도 그는 첫사랑인 안젤리나를 잊지 못했다.
모든 비극은 거기서 시작됐다.

#15

시카리오스가 처음 그녀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을 때, 나는 단지 그가 소꿉친구를 만나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시카리오스가 이즈나 선박조합에 찾아와 해군 선박 건조의 총 책임자로 나를 지목했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의 소꿉친구 남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시카리오스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젤리나에게 시카리오스를 잘 챙겨주라는 부탁을 하기까지 했다. 해군 선박 건조 작업 때문에 일이 바빠서 집에 자주 들리지 못하게 됐다. 그때마다 아내가 시카리오스의 초대로 둘이 함께 종종 저녁을 먹곤 했는데, 나는 추호도 둘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로운 아내를 시카리오스가 돌봐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병신처럼.

#16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안젤리나의 외도를 부추겼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안젤리나의 외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와 시카리오스를 믿었었다.
내 황금처럼 반짝이는 내 굳은 신뢰가 둘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내가 둘을 신뢰한 만큼, 둘 역시도 나를 신뢰할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안젤리나의 경우 내가 사랑하는 아내였기 때문에 믿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였으며, 시카리오스의 경우 이즈나가 자랑하는 변치 않는 신의의 표상이요 신뢰의 대명사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명성을 믿고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신의는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7

그날도 여느 때처럼 군함 제작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당연히 이웃집에 이사 온 시카리오스의 집에 있을 거로 생각하며, 시카리오스의 집에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안젤리나와 시카리오스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시간이 정지한 듯한 기분이었다. 멈춰버린 시간과 함께 내 심장마저도 멎어 버린 느낌이었다. 안젤리나와 시카리오스에 대한 내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매일 집에 돌아왔을 때 안젤리나가 집에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가 시카리오스와 함께 식사할 때마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18

오, 신이시여!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십시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시카리오스와 안젤리나에게 뛰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성을 내고 싶었지만,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진짜 현실이란 걸 깨닫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내를 기다렸다. 그녀가 빨리 돌아와 준다면, 내가 두 눈으로 본 것이 모두 신기루와 같은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될 때까지도…
밤하늘을 비추는 그믐달이 깊이 빠져들 것만 같은 암흑천지의 밤하늘에 우뚝 솟아오른 새벽 무렵이 돼서야 그녀는 집에 돌아왔다.

#19

안젤리나에게 뭐라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두려움 때문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잠든 척 연기를 했다. 안젤리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몸을 눕혔다.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 몸을 일으킨 후,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왜 늦었냐고 채근해 볼까? 아니면 아무 사실도 모른다는 듯이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 볼까? 이런저런 고민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지금 이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는 편히 잠이 들었다. 불쾌한 감정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20

다음날, 시카리오스가 이즈나 선박조합에 찾아왔다.
해군의 해전 훈련 일정이 앞당겨졌다며, 내게 선박 건조를 조금만 더 서둘러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안 그래도 몹시 바쁜 상황인데, 지금보다 더 빨리 배를 만들려면 나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마치 나로 하여금 집에 들어가지 말고 그냥 선박조합 사무실에 계속 머물러 달라는 듯이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다. 당장 멱살이라도 붙잡고 왜 갑자기 해군 훈련을 앞당기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일개 장인에 불과한 신분인지라 이즈나의 해군 제독인 시카리오스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그 무례를 빌미로 시카리오스가 나를 감옥에 보내면, 안젤리나는 영원히 그의 것이 돼버릴지도 모르니까.

#21

나는 초인적인 의지을 발휘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웃으면서 해군 일정에 맞추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분노를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일을 마치면 당장 그녀와 함께 이즈나를 떠나 마리아노플로 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부정한 행위가 내 마음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지만, 그래도 그녀를 용서하리라 마음먹었다. 안젤리나가 없는 삶을 상상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
그리고 누이안은 누구나 한두 번 쯤은 실수를 할 수 있는 게 인생이니까. 그녀 역시 잠시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22

무슨 일이든 평소보다 서두를수록 불필요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최대한 빨리 군함을 완성한 후, 안젤리나와 함께 마리아노플로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가 일을 서두를수록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빨리 일을 끝내려 할수록 일이 더 늦어졌다. 결국, 시카리오스가 부탁했던 납품일을 지키지 못했다. 앞당긴 납품일까지 군함을 완성하지 못하자, 시카리오스가 이즈나 선박조합에 찾아왔다. 그는 내게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서로 간의 약속을 지키는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내가 그 신뢰를 깼지만, 납품일을 당긴 게 해군 측이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고 선심을 쓰듯 내게 말했다.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신뢰를 운운하는 것이란 말인가?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23

결국, 앞당기기 이전의 납품일이었던 날짜가 돼서야 겨우 군함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려 넉 달 동안이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넉 달 동안 선박조합에서 생활한 탓에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수염은 주먹을 쥐어도 붙잡힐 정도로 덥수룩하게 자랐으며, 계속 철야 작업을 한 탓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얼굴이 야윈 상태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더 심각한 상태였다. 시카리오스와 안젤리나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불을 질러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꾹 참았다. 인생은 길고 분노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억지로 생각했다. 원래 계획했던 것처럼 안젤리나를 데리고 마리아노플로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넉 달 만에 돌아온 집에서 안젤리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24

안젤리나는 내가 돌아오는 그 날에도 이웃집인 시카리오스의 집에 가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때, 옆집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시카리오스와 안젤리나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내뱉은 웃음소리였다. 저들은 뭐가 그렇게 즐겁길래 저렇게 웃는 것일까? 나는… 당신의 남편인 나 뒤모스는 넉 달 만에 돌아온 텅 빈 집에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겁단 말인가?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옆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분노의 불길이 거세지는 기분이었다.
참자... 지금까지 잘 참았지 않나? 조금만 더 참자...

#25

저녁 열 시가 됐을 때쯤에 안젤리나가 집에 돌아왔다.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안젤리나의 두 팔을 붙잡은 채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나는 참았다. 지금 일어나 그녀에게 말을 건네면, 끌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잠든 모습을 하고 있자 안젤리나가 조용히 내 옆에 다가와 누웠다.
넉 달 만에 느끼는 그녀의 체향이 불결하게 여겨졌다.
원래 그녀의 체향을 맡을 때마다 나는 애틋한 마음을 느꼈는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일까? 깊은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든 그녀의 옆자리에서 소리를 죽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26

다음 날 아침… 내 삶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그 저주스러운 날의 아침…
그 스산하고 음울했던 아침에 그녀가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곤 중대 발표를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임신했어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인데, 어떻게? 왜?
왜?
도대체 왜!


#27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멍하니 있는 내 앞에서 그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돼서 기쁘다는 둥, 아이가 나를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둥, 재잘거리는 참새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떠들었지만, 커다란 충격 속에 빠진 내게는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라도 내 앞에서 '당신 아이'라는 말을 운운하는 안젤리나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그녀의 뻔뻔한 거짓말에 깜박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안다. 그 진실이 내게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도록 만든다.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


#28

안젤리나에 대한 증오심이 큰 만큼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참았다. 다만 그냥은 참기가 어려웠던 탓에 집안에 있던 술이란 술은 모조리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곤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어느새 시카리오스의 집에 와있었다. 시카리오스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를 반겼다. 나는 그 뻔뻔한 시카리오스의 행동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술기운이 과감한 내 행동을 부추겼다.
나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곤 시카리오스의 복부를 찔렀다. 찌르고 또 찔렀다.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카리오스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몇 달 동안 쌓아 왔던 분노가 씻겨내려가면서 나는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리곤 술기운을 참지 못한 채 기절했다.

#29

술이 깼을 때 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단단한 쇠사슬이 내 두 팔과 다리를 결박하고 있었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나락에 떨어진 듯 절망감에 휩싸여 있을 때, 감옥 밖의 교도관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감방 안에 있는 자식이 우리 이즈나의 영웅인 시카리오스 제독을 암살하려고 했데."
"그럼 시카리오스 제독이 죽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래도 다행히 소꿉친구였던 이웃에 사는 여자가 회복 물약을 지니고 있었던 덕분에 빠른 응급처치로 시카리오스 제독은 목숨을 구했데. 정말 천만다행이야."


#30

아… 안젤리나가 시카리오스를 살렸구나. 결국, 내 인생만 망가진 거로구나…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신은 왜 거짓에 물든 배덕자들을 보호하고 한평생 진실하게 살아온 나를 이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일까?
절망과 회한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채 나는 세상과 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곤 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악마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31

"호, 그 빌어먹을 시카리오스 제독 자식을 자네가 저승 입구까지 안내했다가 실패했다고? 이거 아주 마음에 드는 친구인걸!"
내게 말을 건넨 작자는 애꾸눈의 사내였다. 딱 봐도 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였다. 그는 해적선을 훔쳐 달아난 파로스 왕자와 시카리오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섬에서 파견된 해적 사르케인데, 재수 없게도 그만 이즈나 경비대에 붙잡히고 말았다고 한다. 그가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자넨 왜 시카리오스 자식을 죽이려고 한 건가?"


#32

몇 달 동안 가슴에 쌓여 있던 울분과 분노가 그 순간 거짓말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내 고민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커지고 커진 마음의 짐이 결국 둑을 무너트린 홍수처럼 사르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몇 달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시카리오스가 불륜을 저지르고 결국에는 아내가 시카리오스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모두 고해성사를 하듯이 털어놓았다. 비록 상대가 사제가 아닌 해적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 기분이었다. 해적 사르케는 내 분노에 동조하며 함께 배덕자 시카리오스를 욕해줬다. 솔직히 기뻤다. 상대가 비록 해적일지라도 내 말에 동조해주는 누이안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이.


#33

그날 밤, 해적들이 사르케를 구하기 위해 이즈나의 지하감옥에 쳐들어왔다.
사르케는 내게 손을 내밀며, 자신과 함께 해적이 돼서 더러운 배덕자 시카리오스에게 복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순간, 안젤리나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나는 애써 그녀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나는 그날 이즈나를 떠나 고요한 바다의 으르렁거리는 섬으로 향하는 해적선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나는 해적이 됐다.


#34

내가 해적이 된 후, 시카리오스가 이끄는 해군과 해적들의 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해적에게 붙잡혀 고생했던 파로스 왕자는 시카리오스에게 해적을 완전히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내가 제작했던 군함을 이끌고 으르렁거리는 섬 근해까지 쳐들어와 해전을 벌였다. 이즈나 해군과 해적의 1차 해전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끝났다. 해적에겐 그동안의 해적선보다 더욱 강력한 해적선이 필요했다.
나는 이즈나 선박조합에서 익혔던 실력을 십분 발휘해 해적선을 만들었다. 이즈나 해군의 배와 비슷한 성능을 보였지만, 이것 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시카리오스 놈의 목을 자르기 위해선 좀 더 강력한 배가 필요했다.

#35

기존의 배보다 좀 더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배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나는 매우 특별한 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기존의 어떤 나무보다도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나무를 나는 알고 있었다. 매우 희귀하긴 하지만, 벼락을 맞은 나무가 바로 그러했다. 나는 해적들에게 세상의 그 어떤 배보다 더 강력한 해적선을 만들어 줄 테니 벼락을 맞은 나무를 구해 오라고 말했다. 그동안 내가 만든 함선에 크게 만족했던 해적들은 벼락 맞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삼 년 만에 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벼락 맞은 나무가 모였다. 나는 그 벼락 맞은 나무로 범선을 만들었다.
으르렁거리는 섬의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으르렁거리는 소형 범선'이란 이름을 붙였다.


#36

으르렁거리는 소형 범선을 선두에 세운 해적 선단은 이즈나 해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파죽지세로 해적들은 두 왕관의 이즈나 항구까지 진출해 포격으로 항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부 해적들은 약탈하기 위해 이즈나에 침입했는데, 나는 호위병 여섯과 함께 시카리오스의 집으로 달려갔다. 해전에서 대패한 시카리오스는 운 좋게도 목숨을 부지한 채 집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가슴에 칼을 꼽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시카리오스는 자신의 호위병들과 함께 해적과 대치했다. 그의 등 뒤에는 그의 아내와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의 얼굴이 매우 낯익었다. 매일 밤 내 꿈속에 나타나는 그녀!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녀!
안젤리나, 그녀가 시카리오스이 아내가 되어 있었다.

#37

나는 안젤리나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욕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 실낱같은 기대가 나를 그때까지 짐승이 아닌 누이안으로 유지시켜 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꺼지자 더는 내가 짐승이 아닌 누이안으로 있을 이유가 없게 됐다. 그 순간, 나는 짐승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38

더러운 연놈들의 목구멍에 칼을 쑤셔 박고 잘근잘근 씹어먹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즈나 경비병 놈들이 시카리오스의 집에 들이닥친 탓에 안타깝게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더러운 연놈들의 어린 딸을 납치했다.
아이를 안고 시카리오스의 집을 빠져나갈 때, 안젤리나가 나를 알아봤다. "뒤모스! 아레니아는 당신 딸이에요! 당신이 오해했던 거에요! 제발! 당신의 딸을 해치지 마요!"
더러운 년! 어디서 더러운 입을 놀려 또다시 나를 속이려 든단 말인가! 짐승으로 변한 내게 타오르는 분노는 좋은 먹이일 뿐이다.
나는 분노를 통해 아주 잔인한 운명을 이끌어 내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39

납치해온 안젤리나의 딸 아레니아를 불탄 성의 피 묻은 손에게 맡겼다. 피 묻은 손에선 내가 배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연놈들의 딸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냉혹한 암살자로 잘 키운 후, 내게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놈들이 만들어주길 요구하는 함선을 제작하느라 크게 고생하긴 했지만, 암살자가 된 아레니아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를 죽이게 할 작정이었다.
짐승이 되기로 마음먹기 이전의 나라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패륜을 만들어내기로 나는 마음 먹었다. 그 잔혹한 복수가 내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40

십이 년의 기다림 끝에 나는 피 묻은 손으로부터 암살자로 다시 태어난 아레니아를 돌려받았다. 안젤리나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꼭 빼닮은 아레니아의 모습을 보자 잠들어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아레니아의 옷을 모두 찢어버린 후, 그녀를 범했다. 암살자로 키워진 아레니아는 마치 목각인형 마냥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아레니아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봐라, 이 더러운 연놈들아! 네 놈들의 자식이 감정도 없는 인형으로 이렇게 자랐다. 이제 곧 이 인형이 너희 연놈들의 목숨을 끊어줄 것이다!


#41

나는 아레니아와 함께 이즈나에 잠입했다. 스물여섯 살이 될 때까지 이즈나는 내 삶의 터전이며 꿈과 행복이 함께했던 축복 받은 도시였다. 그러나 마흔다섯의 나이로 다시 찾은 이즈나는 원수가 살아가는 증오가 가득한 도시일 뿐이었다. 내게 거짓말을 반복했던 더러운 연놈들처럼 이즈나의 모든 것이 더럽고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난 마음 먹었다. 이 더러운 도시를 반드시 불태우고야 말겠다고.

#42

나는 아레니아에게 그녀가 납치된 후, 안젤리나와 시카리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둘을 우선 먼저 납치해 오라고 명령했다. 피 묻은 손에서 어찌나 철저하게 잘 교육했는지 아레니아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두 아이를 납치해 왔다. 나는 시카리오스와 안젤리나에게 편지를 썼다. 두 아이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단둘이서 흙먼지 구릉 북쪽의 일식해안에 오라고. 만약, 둘 이외의 다른 자가 함께 온다면 아이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어리석은 시카리오스와 안젤리나는 내 계획대로 단둘이서 일식해안에 찾아왔다. 나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 안젤리나를 향해 독이 묻은 단검을 던진 후 말했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남편의 왼손을 잘라라! 만약 자르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이 아이를 모두 죽이겠다!"

#43

안젤리나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독이 묻은 단검을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아이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아레니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레니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아이 중 하나의 가슴에 칼을 꼽았다. 칼에 맞은 아이는 힘없이 백사장 위에 쓰러졌다.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백사장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안젤리나의 비명과 시카리오스의 고함이 들렸다. 나는 그들의 외침을 무시한 채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제 하나 남았다. 만약 이번에도 네 남편의 왼쪽 손목을 자르지 않는다면, 남은 한 아이도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44

잠시 망설이던 안젤리나는 내가 낮은 목소리로, "아이를 살리기 싫은가 보군."이라고 말하자, 입술을 꽉 깨문 후 시카리오스의 왼손을 잘랐다.
남편의 왼손을 자른 안젤리나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렸다. 단검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카리오스가 쓰러졌다. 로카의 장기말들에 사는 살모사의 맹독은 순식간에 살아 있는 목숨을 송장으로 만들었다. 독이 몸에 퍼져 죽어가는 와중에 시카리오스는 안젤리나에게 말했다.
"여보, 잘했소. 내 몫까지 아이들과 꼭 함께 살아남으시오. 그리고... 사랑하오..."
재수 없는 놈!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놈에게 내가 너무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생겼다.
젠장!


#45

시카리오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안젤리나를 바라보며, 나는 살아남은 아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아레니아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아레니아는 살아 있는 남은 한 아이의 목을 잘랐다. 암살자로 변한 아레니아는 자신의 친동생 둘을 직접 죽인 것이다.
남은 아이의 죽음에 놀란 안젤리나는 비명을 지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내게 외쳤다.
"왜! 도대체 왜!"


#46

원래 나는 아레니아로 하여금 안젤리나를 죽이게 할 작정이었지만, 안젤리나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계획을 바꿨다.
나는 안젤리나에게 다가가 땅에 떨어진 독이 묻은 단검을 집어 들어 그녀의 심장에 꽂았다. 그리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네 거짓이 내 인생을 망쳤어! 그리고 그 거짓말이 결국 네가 가진 모든 걸 잃게 한 거야!" 순식간에 독이 온몸으로 퍼져가면서 안젤리나의 생명이 꺼져갔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말했다.
"어리석은..."
그녀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독이 퍼져 결국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47

안젤리나와 시카리오스 일가족의 시신을 일식해안에 그대로 버려둔 채, 아레니아와 함께 이즈나로 돌아왔다. 나는 아레니아에게 이즈나 곳곳에 불을 지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곤 내가 예전에 살았던 시카리오스의 옆집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그 집은 과거에 내가 안젤리나와 함께 살았던 상태 그대로였다. 내가 보던 책과 일기장 편지와 옷 등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왜 이 집을 그대로 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이곳에 들렸을 때 감동해서 납치해간 아레니아를 친딸이라고 착각한 채 다시 돌려주길 원했던 것일까?



#48

복수를 마치고 나자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는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과거에 내가 사용했던 물건 몇 개를 챙긴 후, 이즈나 곳곳에 불을 지른 아레니아와 함께 성을 빠져나왔다. 나는 아레니아의 팔목과 다리의 심줄을 자른 후, 이니스테르의 환락가에 그녀를 팔았다. 그리곤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죽였던 두 아이는 네 친동생이란다. 그리고 그날 해변에서 죽은 부부는 네 친부모란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지? 네 엄마는 원래 내 아내였는데, 네 아빠와 바람이 나서 날 배신했단다. 난 그래도 그녀를 용서했는데, 널 임신한 상태에서 네가 내 자식이라고 속였단다. 사실 난 아이를 만들 능력이 없는데 그녀가 그걸 몰랐던 거야. 결국, 부정한 씨앗인 네가 잉태되면서 난 짐승으로 살아야 했다." 감정이 없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아레니아는 내 속삭임에 가늘게 몸을 떨었지만, 큰 반응은 없었다. 아마 몇 년 동안 사창가에서 몸을 굴리면서 감정이 되돌아오면 그땐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9

이렇게 내 잔혹한 복수는 모두 끝났다.
복수만을 쫓으며 분노로 점칠 된 내 삶은 으르렁거리는 섬의 방탕한 해적들과 함께 짐승이나 다름없는 만행을 저지르며 계속됐다.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고, 여인을 겁간하고, 인신매매를 일삼았다. 아레니아를 사창가에 판 후, 십오 년이 지났을 때쯤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자결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 묻은 손에게 세뇌당해 인형이 되었던 아레니아가 인성을 되찾기까지 무려 십오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짐승으로 변해버린 나는 과연 인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50

어쩌면 내가 인성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편지가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안젤리나가 남긴 편지. 그녀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복수가 끝난 후, 세월이 흘러 모두 희석되어 사라졌다. 지금 이렇게 회고록을 쓰면서 그 분노의 시간을 떠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분노가 치밀어오르진 않고 있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왜 그녀는 나를 배신해서 우리 모두의 운명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 왜 나는 그때 조금만 더 참지 못했던 것일까? 만약 내가 그때 조금만 참고 계획대로 안젤리나와 마리아노플로 떠났다면 사창가에서 자결한 아레니아가 내 딸로 자랐을지도 몰랐을 텐데...
이래서 복수는 덫 없는 것인가 보다.



#51

이제 모든 마음의 정리가 끝났다.
안젤리나와 나 사이에 비극이 벌어지기 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편지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다.
나는 이 편지를 봉인하고 있는 밀랍을 뜯었다. 그리고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안젤리나의 필체가 적힌 편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52

사랑하는 뒤모스,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어요. 사실 이 이야기를 좀 더 빨리하고 싶었는데, 어제 시카리오스의 동생이 사고로 죽은 탓에 밤늦게까지 그를 위로하느라 이 즐거운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제게 미안해할까 봐 그동안 말하지 않았는데, 당신도 아는 제 사촌 제네오가 당신이 체질적으로 마력이 강성한 몸을 타고나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라고 했어요. 제가 어떻게든 당신이 절 임신시킬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없느냐고 묻자, 그가 약을 만들어 주겠다며 여행을 떠났었죠. 그리고 넉 달 전에 제네오가 당신이 일을 나갔을 때 집에 들러서 약을 주고 갔어요.


#53

약을 먹으면 일주일 동안 마력이 약해져서 임신이 가능해지는 약이래요. 당신 몰래 식사에 이 약을 꼬박꼬박 열심히 넣었더니 기적처럼 제가 마침내 임신하게 되었답니다. 그동안 당신이 너무 미안해할까 봐 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당신의 아이를 가지게 돼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거에요. 그동안 저 때문에 임신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화 한번 내지 않고 항상 절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우리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요. -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안젤리나가

#54

안젤리나…
아레니아…
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란 말인가!
오! 신이시여!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해주십시오! 내가 읽고 있는 안젤리나의 이 편지가 거짓이라고 말해주십시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술에 취해 잠든 채 꾼 꿈이라고 말해주십시오!
제발!
제발…


#55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죽을 자신은 더더욱 없다. 누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가 안젤리나를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레니아…
살가운 말 한마디조차 못 해준 그 불쌍한 아이… 그 아이를 만나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누이 여신이시여 영원한 죄악의 굴레에서 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승에서 안젤리나와 아레니아를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56

부디… 이 회고록을 읽는 자가 누가 되었든, 나처럼 어리석고 추한 삶은 살지 않길 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 이전에 그 운명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기 이전에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혹시 자신의 분노가 열등감과 같은 콤플렉스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지 살피길 바란다.
부디 나 같은 천치가 세상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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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블랑 @노아르타 | 55레벨 | 검은 기사 | 페레 (2016-04-11)
우수편집자 : 블랑 @다후타 | 계승자 36레벨 | 정령술사 | 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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