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나의 진혼곡

이즈나의 진혼곡

제목 : 이즈나의 진혼곡
분류 :
작자 : 미상

내용

#1

괴롭다.
비참하다.
현실은 냉정하다.
그리고 잔혹하다.
잔혹한 현실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2

이즈나 대학살은 평화롭던 이즈나를 끔찍한 지옥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누이안이 대학살 속에서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마저 차갑게 변하게 하였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울부짖으며 자식을 찾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피가 터지라 외쳐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스텔라! 어디 있니? 아빠 목소리가 들리거든 대답 좀 해보렴!"
며칠째 이즈나 곳곳에서 딸아이를 찾는 외침을 토해냈으나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3

이즈나 대학살이 있기 전까지 내가 기르던 강아지인 부르트가 내게 달려왔다.
전쟁통에 혼란이 극에 달했는데도 용케 목숨을 부지한 상태로 주인을 찾아온 것이다.
잡종이라 족보도 없는 녀석이라고 홀대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명견인 것 같다.
기특한 것.
영리한 부르트가 날 돕는다면 잃어버린 딸 아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르트에게 말했다.
"부르트! 스텔라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렴!"

#4

부르트는 자신이 스텔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날 어디론가 안내했다.
이즈나에 사는 수많은 누이안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돕지 않았는데, 강아지 부르트의 도움으로 스텔라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쁨과 함께 씁쓸한 마음이 교차했다.
전쟁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앗아갔구나...
부르트는 이즈나 시장 골목 안으로 달려갔다.
복잡한 골목 사이사이를 달려가더니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있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웅크린 몸으로 땅바닥에 앉은 아이는 열두 살 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부르트가 명견이라고 생각한 건 취소해야 할 것 같다.

#5

부르트가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매우 익숙한 자세로 자신의 품에 달려든 부르트를 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부르트는 연신 긴 혀로 아이의 볼을 핥았다.
아이는 나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부르트에게 물었다.
"전에 말했던 네 주인이니?"
부르트는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짖어댔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네 부탁대로 해줄게. 그리고 사실,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렴."
아이와 부르트는 꼭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다.

#6

"아저씨 딸을 제가 찾아줄게요."
아이의 말에 부르트가 기쁜 듯이 짖어대더니, 내게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부르트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하마."
아이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더니 신음을 토해냈다.
"아이고, 온몸이 다 뻐근하네."
마흔이 넘은 중년의 사내가 낼법한 소리를 어린아이가 토해내고 있었다.
이 녀석 정체가 뭐지?

#7

"요즘 이즈나에 어린아이 유령들이 거리를 떠돌고 있어요."유령? 유령은 보통 누이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인데, 아이가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일까?아이는 시장 구석진 자리에 멍한 눈으로 서 있는 여자아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저 아이는 유령이에요."
실어증에 걸린 듯한 모습의 아이였지만, 죽은 유령 같아 보이진 않았다.
"죽은 유령이라고 하기엔 너무 혈색이 밝은 거 같은데. 전혀 죽은 유령 같지가 않아."
담담한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유령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죽임을 당한 순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법이죠. 저 아이는 지금 자기가 죽은 걸 모르고 있어요."

#8

아이가 여자아이 유령 곁으로 다가갔다.
"얘, 너 이름이 뭐니?"
여자아이 유령은 고저가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왜 여기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엄마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어."
아이는 여자아이 유령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오빠가 엄마를 찾아줄게."

#9

아이는 시장을 빠져나와 성 밖을 향해 걸어갔다.
난 아이의 발걸음을 쫓으며 물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니?"
"공동묘지요."
"거긴 왜?"
"이즈나 대학살에서 죽은 누이안의 시체를 모두 공동묘지에 묻었어요. 그곳에 가면 안나의 엄마가 있을 거예요."
안나의 엄마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안나의 엄마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나의 엄마는 죽었어요. 살아 있었다면 안나가 기다리는 곳에 분명히 왔을 테니까요. 자식을 잃은 부모란 원래 그런 거니까..."

#10

공동묘지에는 처참한 모습의 유령들이 가득했다.
자신의 잘린 목을 부둥켜안고 있는 남자 유령에서부터 하반신이 잘려나간 유령, 양팔을 전부 잃어버린 유령, 아랫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주워서 자신의 뱃속에 다시 집어넣고 있는 유령까지...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 유령들은 모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죽었을 때의 모습으로 있는 거에요."
아이는 이런 처참한 광경에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두 다리가 잘린 여자 유령에게 다가갔다.
"이봐, 안나라는 아이의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
두 다리가 없는 유령은 말없이 손을 들어 왼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팔과 다리를 모두 잃어버린 여성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쓰러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와 몸통만 덩그러니 남은 유령을 향해 다가가자 울고 있는 여자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에게 가야 하는데... 안나가 날 기다리고 있는데..."

#11

안나의 엄마와 함께 이즈나로 다시 돌아갔다.
머리와 몸통만 남은 안나의 엄마는 내가 안고 갔다. 팔다리가 없어서 업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처참한 모습의 여자 유령을 안고 가기에 꺼림 직했지만, 자신의 딸을 애타게 찾는 모습에 동질감이 느껴져 군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고 있다.
시장에 멍하니 서 있는 안나의 근처로 다가가자 앞서 걸어가던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내게 안겨 있는 안나의 엄마를 향해 몇 번의 손짓을 했다. 그러자 머리와 몸통뿐이던 안나의 엄마의 몸에 팔과 다리가 솟아났다. 그리고 피에 물들어 있던 모습도 깨끗하게 변했다.
놀라운 모습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뭐지?
아이는 쓸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나가 놀라면 안 되잖아요."
유령이 된 채 다시 상봉하게 된 안나와 엄마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오열을 토해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듯이 꼭 부둥켜안은 모녀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흐릿하게 변해갔다.
"소원을 이뤄서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에요."

#12

"스텔라가 평소에 무서워했던 게 있나요?"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호박 귀신을 몹시 무서워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박 귀신을 무서워 했다라... 스텔라는 아빠를 꼭 빼닮았군요."
놀라움에 절로 눈이 커졌다.
어린 시절 나는 호박 귀신을 몹시 무서워했다. 그래서 스텔라가 호박 귀신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며 날 정말 많이 빼닮았다고 생각 했었다.
이 아이는 내가 호박 귀신을 무서워했던 걸 어떻게 아는 걸까?

#13

아이가 이즈나 왕성의 마법사 복장을 한 남자를 찾아갔다.
아이가 평소에도 왕성에 자주 출입했는지, 왕성 경비병들은 아이가 왕성에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다.
아이가 찾아오자 마법사로 보이는 사내는 반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드디어 소원을 이룬 거니?"
아이가 방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어요. 호박을 귀신의 얼굴처럼 꾸며서 관청과 시장과 주거지역 쪽에 달아주세요."
마법사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막 끝난 상태라 호박을 구하기 어렵겠지만, 네가 그동안 우리 이즈나에서 해준 일이 있으니 노력해 보마."
이 아이가 그동안 이즈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한 것일까?

#14

아이가 찾아갔던 마법사는 이즈나의 상당한 권력자였던 것 같다.
관청과 마을 곳곳에 호박 귀신의 형상을 한 호박 장식이 동시다발적으로 걸렸다.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바로, 스텔라였다.

#15

스텔라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 스텔라는 항상 울면서 내게 달려와 안겼다.
품에 안긴 스텔라는 쫑알쫑알 참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엄마는 밉고 아빠는 사랑한다는 말을 항상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스텔라를 꼭 안은 후, 볼에 뽀뽀를 해줬다. 물론,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은 것은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일 뿐이지만.
사랑스러운 딸을 안기 위해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스텔라, 아빠다!"

#16

내게 달려오던 스텔라는 내 몸을 그대로 뚫고 지나쳤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스텔라를 꼭 안아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가 언제부터 내 등 뒤에 있었던 거지? 그리고 스텔라는 왜 내 몸을 통과한 거지?
망연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말했다.
"축하해요. 딸을 찾고 싶다는 소원을 이뤘군요. 그러니 인제 그만 편한 마음으로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세요."

#17

순간, 내 왼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워본이 내 심장을 뽑아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었다.
몸이 점점 흐릿하게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나를 어디론가 잡아당기고 있다.
편안한 마음이다.
이대로 내 몸을 잡아끄는 이끌림을 따라가면 편안한 안식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8

나를 안식의 길로 인도한 아이의 곁에 왕성에서 봤던 마법사가 다가와 말했다.
"축하합니다. 동생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난 삼십 년 동안 이즈나를 돌봤던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도 이제 소원을 이뤘으니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맞이하십시오."
마법사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우 익숙한 미소였다.
30년 전, 아홉 살에 불과한 내가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렸을 때 나를 구하는 대신 목숨을 잃었던 형이 보였던 바로 그 미소...
30년 전의 어린아이 모습을 한 형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19

나는 영혼의 육신을 잡아끄는 이끌림을 잠시 거부한 채 형상이 흐릿해져 가는 형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우리의 육신이 이내 형상에서 벗어나 강한 이끌림에 따라 아득한 저편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유령은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맞이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강한 염원을 지닌 영혼은 유령이 된 상태에서 소원을 이루기 전까지 누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오늘 우리는 염원을 이뤘다.
누이 여신의 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관련 링크

이 문서는 총 2번 편집 되었으며, 2명이 편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최종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2016-08-24)
우수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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