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2: 기다리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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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2장. 기다리던 사람

"주문하신 카나페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승의 돌이란 게 혹시..."

소녀는 요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품 안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꺼내 풀었다. 그 안에서 묘한 녹색 빛이 감도는 거친 돌 몇 개가 굴러 나왔다.

"이 전이석 말씀이세요?"

엘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승의 돌 맞는 것 같은데... 전이석?"

"아, 제 고향 안델프에서는 그렇게 불러요. 전이석."

안델프를 고향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드워프인 것 같았다. 남자 드워프들은 술통 같은 몸과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여자 드워프들은 심하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그 뒤로 봉긋 튀어나온 귀를 빼면 인간 소녀와 구분이 힘들었다.

"이 전이석이... 저승을 통과하는 물건이란 말씀이시죠?"

"그래요. 그런데 아가씨, 이름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소녀는 세자비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살포시 인사를 했다.

"... 실례했습니다. 세자비 님. 안델프의 기계공 미카엘라 융예라고 해요."

"융에? 네가 그 융에야?"

엘테르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미카엘 융에 2호기였나? 왜 있잖아. 예선전에서 기계화 보병인가 뭔가 하는 쇳덩이를 타고 모조리 박살 내는 바람에 출전 금지 먹은..."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 모였다.

"전, 작잖아요."

소녀의 뺨이 붉어졌다. 밤의 등불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 핸디캡에 대한 당연한 요구였어요."

핸디캡에 대한 당연한 요구라니. 웬만한 마법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경기장의 결계가, 그 쇳덩이가 내뱉은 폭발물에 단박에 터져버렸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폭발의 후폭풍에 휘말린 관람석이 아수라장이 되며 그날의 경기는 중단되었다. 그 위력에 눈이 돌아간 각국의 군 관계자나 무기상들이 수입 계약을 하겠다며 운전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물건이?

"왜 근데 여기 있어? 뭐 물어 내래?"

"아뇨. 이 집이 스튜를 잘한다기에 배울까 해서..."

"엘테르? 그쯤 해둬요."

그대로 뒀다간 이야기가 옆길로 샐 것 같아 세자비는 말을 가로챘다.

"그보다 미카엘라 양? 저승의 돌에 대해서 할 말 있나요?"

"네. 이게 저승을 지나가는... 통과하는 물건이라면... 어쩌면... 음... 제 예상이 맞다면 이걸 이용해서 가능할 거예요. 인지적 밀폐로 공간 간섭을 최소화하고, 이동 벡터의 한계를 계수 내에서 풀어내 동적 흐름을 유체 속도로 유지한다면 내부 생체 구조의 물리화학적 붕괴에서도 안정성을 오차 범위 한계로 유지하면서 목표 좌표에의 재기록시키는 일이 증명 가능한 명제로..."

"조... 조금 쉽게 말해줄래요?"

"저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잠깐 다녀올 수 있을지도..."

소녀를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네?"

"진짜야?"

"정말입니까, 소저?"

소녀는 셋의 기세에 눌린 듯 머리를 푹 숙이며 뇌까렸다.

"아? 그게, 가설이고. 증명되진 않았어요. 연구할 시간과 비용이..."

세자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증명해 주세요."



* * *



다음 날.

어느 저택의 큰 방을 나서는 세자비.

방 안에서는 소녀의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밟지 마요, 밟지 말라고요! 아이참. 이거 여기 두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방향이 거꾸로에요 거꾸로. 꺄악!? 그걸 거기에 끼우면 어떻게 해요? 파손 주의라고 써져 있잖아요. 좀 살살하면 안돼요? 엄마야아앗! 그거 폭발물이라고! 터져, 터져, 터진다고오오오오옷!"

엘테르가 질린 얼굴로 세자비의 뒤를 따라나오더니, 문을 쾅 닫았다.

"세자비... 쟤, 괜찮은 거야?"

"봐야 알죠, 뭐."

세자비는 쿨하게 대답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그녀는 다수의 경비병을 대동하고 주점을 찾았다. 밤새 일하고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미카엘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질질 끌려 나오자 그녀는 '준비됐죠?'라며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요리사가 말 없이 그 큰 덩치로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럼, 있다 봬요. 요리사님.'이라고 단정한 인사를 건네는 세자비에게 당황하는 틈을 타서, 경비병들은 소녀를 이 방으로 데려왔다.

'왜 이러세요, 세자비 님. 네? 왜 이러세요...' 넋이 나간듯 중얼거리던 소녀가 돌변한 것은, 방 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자신의 짐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소녀는 '내 짐!'이라고 찢어질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짐더미 위에 몸을 던지더니, 잔뜩 성이 나서 주변에서 쉬고 있던 일꾼들을 향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방, 연구실로 써요.'라고 알려주려던 세자비의 말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녀의 질타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빽빽대며 일꾼들을 일사불란하게 부리는 모습에 엘테르마저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왔다.

"휴. 가끔, 세자비는... 무서워."

"제가 뭘요?"

"...자각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워. 실행력 뭔데? 밤도 꼴딱 새고. 안 졸려?"

"잠 못 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졸린 건 괜찮아요. 꿈의 내용이 힘든 거지."

"하... 그래. 그건 그렇다 쳐."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며 걸어가는 세자비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던 엘테르는, 문득 세자비의 위아래를 눈으로 훑었다.

"그런데 뭐야, 그 차림새? 못 보던 옷인데?"

"아, 이거요?"

그녀는 무투회 의전식에서 입었던 드레스나 예선전에서 입었던 금빛 갑옷이 아닌, 여행자들이 입을 법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되기는 했지만 군데군데 성긴 자국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옷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허리춤에는 호신용 칼까지 차고 있었다.

"항상 틀어올리던 머리도 다 빗어 내리고... 오늘 경기 관람하려던 거 아니었어? 어디 가?"

세자비는 웃었다.

"가진 않아요. 오죠."

"누가?"

세자비가 대답하려는데 복도 반대편에서 몇 사람이 웅성거리며 걸어왔다. 그쪽은 저택의 다른 쪽 끝으로 무투회 출전자들을 위한 대기실로 쓰이고 있었다. 걸어오는 사람들 중에는 간밤의 하슬라 왕세자도 끼어 있었다. 예상대로 숙취에 시달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여, 금수저!"

엘테르가 반색을 표하며 다가서자, 왕세자를 둘러싸고 있던 하슬라 측 출전자들이 막아섰다. 왕세자는 손짓으로 그들을 물린 다음 힘겹게 대답했다.

"뭐야, 테미켓... 나중에 말해."

"오늘 경기, 나가는 거지? 무운을 빈다고."

"...이 두통이 누구 때문인데."

"그거야 받아 마시는 사람이 조절을 잘 해야지. 난 무리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어?"

"..."

왕세자는 진저리를 치면서 지나갔다. 엘테르가 '힘내! 너한테 걸께!'라고 외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무투회 본선이 풀리그(모든 팀이, 모든 팀을 상대로 경기를 하는 것)로 치러지니 만회할 기회야 있겠지만, 오늘의 경기는 망한 게 확실한데 저놈의 페레는 나 몰라라 사람 염장이나 질러댄다.

그동안 다른 선수들도 차례로 세자비 앞을 지나쳐 갔다. 일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출구로 향하는 한편, 일부는 세자비를 알아보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거나 더러 그녀의 이름에 승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자도 있었다. 각양 각색의 출전자들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세자비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그들의 행렬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왜 세자비가 계속 서 있는지 궁금해진 엘테르가 물어보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또 다른 출전자들이 걸어왔다. 엘테르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 나, 잠깐 일 좀 보고올께엣!"

세자비가 돌아보니 이미 엘테르는 창문 빛 너머의 그림자로 스르륵 몸을 감추고 있었다.

세자비의 앞까지 걸어온 것은 일단의 페레 무리였다. 그 무리의 리더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이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

"불숨결 부족의 나츠빌 마라, 두 왕관의 젖줄기이신 세자비를 뵙습니다."

"아논 대 마라의 오른팔이시자, 초원의 띠의 한 가닥 바람이신 나츠빌 마라를 뵙습니다."

'마라'란 페레 부족의 족장을 일컫는 말. 족장답게 그녀의 동작은 나긋나긋하면서도 절도 있었고 등의 화살통에 담긴 화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세자비가 페레들의 예법에 따라 화답하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나츠빌 마라가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와 이야기하고 계셨습니까? 저희 초원의 띠의 주민 같았습니다만, 누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아닙니다. 손 씻을 곳을 찾으시기에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용서하십시오. 이 땅의 풍습은 생소한 것이라 실례가 많답니다."

페레들은 대부분 유목 민족이어서 정착민들과의 생활방식이 달랐다. 하물며 바다를 건너 서대륙으로 온 일단의 페레 출전자들에게는 도시에서 지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다행히 그들을 이끌고 있는 나츠빌 마라는 페레 중에서도 정착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때문에 그녀의 수하들도 이쪽의 안내에 잘 따라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도시 한복판의 우물가에서 목욕을 한다거나, 경기장 뒤편 땅을 파고 볼일을 본다거나 하는 자잘한 소동이 몇 번 있었다. 엘테르처럼 도시에서도 잘 지내는 페레는 드물었다.

"엄중히 일러두었습니다만, 혹 같은 일이 벌어지거든 꼭 알려주십시오. 그때는..."

말줄임에 동행하던 다른 페레들이 움찔했다. 대부분 그녀보다 머리 하나씩은 큰 용사들이었다.

"네."

"그리고... 혹시나 말인데."

갑자기 긴 한숨을 몰아쉬는 나츠빌 마라.

"저랑... 아니, 어느 산만하고 버릇없고 지지리도 말 안 듣고 술고래에 손버릇 나쁘고 오지랖 넓은 페레년... 주변에서 보거들랑, 한밤중이라도 좋으니 꼭 알려주셔야 합니다. 제가, 그년 잡아다가 다리몽둥이를 확..."

나츠빌 마라로부터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는 한기. 세자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몹쓸 년... 썩을 년...'하며 열을 올리던 나츠빌 마라는 제 분에 못 이겨 씨근덕대더니, 세자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은 채 휙 돌아 성큼성큼 지나쳐 갔다. 페레의 용사들도 그 한기에 얼었는지 한동안 오금을 못 펴다가 그녀가 한참 멀어진 뒤에야 이쪽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따라갔다.

"... 갔어?"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림자 속에서 엘테르가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눈동자가 올망올망하고 등이 잔뜩 굽은 채 움츠러 든 것이, 겁먹은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죄지었어요? 누군데 그래요?"

"몰라! 아니... 알긴 아는데, 아는데. 음... 여하튼 그렇게 심각한 사이는 아냐."

세자비가 그녀를 만난 지는 열흘도 채 안 됐지만 이렇게 안절부절 말을 아끼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래도 말 마나 심각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심각했으면 기둥에 딱 붙어서 그들이 간 쪽을 슬쩍 훔쳐보느니, 당장 줄행랑을 놓았을 테니까.

그 사이에도 다른 출전자들이 계속 두 사람의 앞을 지나갔다. 형형 색색으로 빛나는 갑옷과 무구로 중무장한 사람들, 긴 로브를 늘어트리고 지팡이를 쥔 마법사들, 음침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살장에나 쓸 법한 녹슨 칼을 든 사람들. 심지어 애들이나 좋아할 듯한 귀여운 인형 옷을 뒤집어 쓴 채 열병식이라도 하듯 듯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오와 열을 맞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인형옷이 너무나 인상적인 나머지, 출전자들이 나간 쪽을 흘끔거리던 엘테르조차 웃음을 참기 위해 숨을 흡 하고 들이쉬었을 정도였다. 그들마저 다 지나간 뒤에야 '봤어? 방금?'이라면서 말을 건네려는데, 세자비의 눈길은 그들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은 이제 인적이 끊긴 대기실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 없어요."

"누가?"

"그 사람이요.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어제 받은 새 참가자 명부에 있었다고요!"

굳은 표정으로 손을 그러쥐는 세자비 때문에, 엘테르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왜 그래? 어? 어어?! 울지 마?!"

세자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사람.... 그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나는... 나는... 이 대회를..."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그리고 어제 그의 이름이 출전자 명부에서 발견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행여 안 오지는 않을까. 왔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인들을 일러 몰래 주시하라고까지 했는데. 분명 오늘 아침에도 참가가 확정되었다고 하길래 그와 만났을 때 입었던 이 낡은 옷을 부러 입고, 그에게 안녕과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를 건네고 싶었는데! 멋 부릴 때가 아니었다. 확인해야지. 또 아쉬운 이별은 사양이야.

이번에야말로!

엘테르의 손을 뿌리치고 대기실로 달려가려는 참이었다. 출전자들이 나간 출구 쪽에서 누군가 불렀다. '있어요? 남아 있는 사람, 없나요?'라며. 문으로 들이치는 빛 때문에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기, 나오세요. 출전자 확인이...'라고 말을 잇다 말고 멈칫거리더니 세자비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안?"

빛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짙은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등에는 장총과 방패를, 허리춤엔 단도를 찬.

세자비. 마리안 노르예트는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엘테르는 세자비의 옷자락에서 손을 뗐다.

먹먹하고 그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마리안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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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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