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저승의 밤 서장3: 가문의 무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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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저승의 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장 제 3장. 가문의 무투회

다른 선수들이 남아있는지 확인하겠다며 들어간 출전자가,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자 경비병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눈물 범벅이 된 세자비를 보자 출전자에게 대뜸 창부터 겨눴다. 엘테르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 어?' 하고 있는 반면, 세자비의 이름을 부른 출전자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 창을 물려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목울대를 삼킨 마리안의 말에, 경비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창을 거뒀다.

"... 잘 싸워. 잘 싸우고..."

마리안은 참가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와 줘서, 고마워"

출전자는 다른 사람들 앞이라 부끄러웠는지 짧게 답했다.

"...나도. 이따 보자."

그렇게 그녀는 돌아서서 경비병들을 헤치며 빛의 출구 속으로 걸어나갔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있던 엘테르는 경비병들까지 모두 빠져나간 뒤에야 슬금슬금 마리안에게 다가와 눈물자국을 슥슥 닦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마리안은 웃음이 나왔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종알대야 직성이 풀리는 것 아니었나?

"... 뭐예요. 내가 애도 아니고."

"지가 애인 줄은 알아? 뭐야, 쟤? 혹시 정부 같은 거야?"

"큰일 날 소릴 하네요. 여행 도중 만난 사람이에요. 목숨을 빚졌죠."

"목숨이라니... 그건 그렇고. 이름이 왜 저래?"

"... 이름이 어때서요."

마리안이 발끈하자 그제서야 엘테르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너츠? '가나 너츠'가 뭐야. 뒷동산 나무 열매야? 내 평생 듣던 중에서 제일 촌스러운 이름인데."

"사연이 있는 이름이라고요. 물론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웃었는데... 웃었는데요!"

새빨개져서는 까도 내가 까 같은 변명을 하는 걸 보니,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었다.

"하여튼 쟤 경기 보러 나갈 거지? 코 좀 풀어. 아니, 세수 좀 하고 오는 게 낫겠다. 만나면 반가울 일이지 왜 질질 짜고 난리람? 난 적당한 데서 따로 보고 있을 테니 가서 자리를 지키라구. 네 극성 삼촌이 너 여기서 울고 있더란 보고받으면 어쩔 줄 알구? 그럼... 알았지?"

엘테르는 휙 돌아서서 손수건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마리안은 양손으로 두 볼을 찰싹! 하고 쳐서 정신을 가다듬은 뒤, 문간 대야의 소세 물로 세수를 마치고 중앙 관람석으로 올라갔다.

"... 늦으셨습니다. 세자비 마마."

굵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관람석 위쪽에서 들려왔다. 노르예트 가문의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인 중년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시커멓게 그늘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가주님."

"앉으시지요. 곧 식이 시작됩니다."

마리안이 그 옆의 자리에 앉자, 의전관이 나팔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팔수가 길게 나팔을 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자 의전관은 우렁찬 목소리로 그날의 개회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회사를 마치고 폭죽이 터지면서, 출전자들의 무리가 입장했고 박수와 환성과 야유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중에는 마리안의 은인 - 가나 너츠도 있었다. 훤칠한 키에 타이트한 가죽 부츠. 대충 손질한 듯한 긴 머리의 앞쪽은 한쪽 눈을 가릴락 말락 했다. 그녀는 다른 출전자들처럼 적당히 팔짱을 낀 채 개회사를 듣다가 마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윙크를 해 보였다.

"... 저놈이냐?"

마리안은 웃음이 나왔다. 가주님이라 불린 남자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출전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눈길은 마리안을 따라 가나 너츠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삼촌 비고 노르예트. 노르예트의 제독. 가문의 거친 병사들을 말 한마디로 따르게 만드는 자. 남부의 제해권을 손에 쥐고 해적들을 토벌하는 한편, 원대륙 개척 선단을 호위하며 노르예트의 위치를 경시할 수 없는 곳까지 끌어올린 자. 하지만 자신의 조카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삼촌이기도 했다.

"내 저놈을..."

"그 사람이에요. 말씀드린."

비고 노르예트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 데려다 포상하마. 아주 크게. 노르예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출전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시작하라!"



* * *



본선 첫 경기에 나온 것은 귀여운 인형 옷을 뒤집어쓴 출전자들이었다. 방금 전에는 그저 주최측의 짓궂은 장난이려니 하던 관중은, 그들이 진짜 출전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의전관이 그들의 출전명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위오니드 숲 엘프들의 현왕(琅王) - 휘파람 부는 자 '에노이르'와 그의 춤추는 자들 - 에오카데스!"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뭐?"

"... 엘프들이라면..."

"그... 그거 아냐? 싸움에 미쳐 살고 제 피붙이와도 싸워 죽인다는..."

"맞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저치들이 직접 열었던 그쪽 무투회에서 우리 쪽 기사 한 명이 죽었다던데..."

"... 이젠 직접 사람 죽이러 숲 밖으로 나왔나?"

"근데 뭐야? 저 인형옷은 왜 입고 있는거야?"

거의 소란이나 다름없어진 웅성거림에도 엘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선두 바로 뒤에 선 마법사만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마법사에게 선두의, 엘프들의 왕이라 불린 당사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성공적이지 않습니까, 벨리온."

"...어디가 말입니까."

인형 옷 뒤집어 쓰고 타 종족의 무투회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게?! 벨리온이라 불린 마법사로서는 왕이 벌이는 이 기행이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미지 갱신을 위한 충격적인 변신. 가끔은 필요하지요."

"그 충격이 너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왕이 되셨다고 이렇게 막 나가시면..."

"그럼 말든가요. 누가 시켜달랬나요, 왕? 그저 원로원의 외부 교섭을 위한 장기짝 아닙니까."

그렇게 마법사에게 핀잔을 주면서 엘프들의 왕은 검집에서 칼을 뽑았다. 사아악 - 하며 뱀이 수풀을 가로지르는 듯한 그 소리에 수하들도 일제히 칼을 꺼내 겨눴다. 상대팀은 이미 공포에 질려 넋을 놓고 있었다.

"장기짝이라면,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여야겠지요."

그렇게 첫 경기는 싱겁게 끝이 나 버렸다. 상대팀은 죄다 엘프들의 칼이 몸에 닿는 둥 마는 둥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분을 못 이긴 엘프 마법사가 홧김에 마법은 고사하고 지팡이로 냅다 후려 패는데도 얼씨구나 드러누울 정도였다.

'차라리 누군지 몰랐으면 뭐라도 해봤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저것들이 전설 속에나 나오던 미친 살인귀들임을 안 다음에야 무투회고 뭐고 그저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법사는 분풀이 삼아 더 두들겨패려다 상대가 하도 엄살을 피우자 그것마저도 그만둬 버렸다. 맥이 빠진 그가 관중석으로 눈을 돌리자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평소 같으면 엄살 부리는 상대팀에게 야유라도 보냈겠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 상대가 엄살을 부리든 말든, 엘프들이 그들을 죽이려면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엘프들이 결투 중 사람을 죽인다는 건 수백 년 전의 풍습일 뿐. 현재의 엘프들과는 관계가 먼 이야기였다.

'그 오해를 풀겠다는 것 까진 좋은데, 현왕께선 어찌 이런 추태까지 고집하시는가!'

옆을 보니 현왕도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했다. 뒤늦게 후회라도 하는지 깊이 고개를 떨구며 탄식한다.

"... 귀여움이 부족한가, 이 옷으로는."

"..."

이 가슴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표현 못 할 울분이여!

"그. 러. 니. 까!"

몸을 돌려 퇴장하는 현왕의 뒤를 쫓아가며 마법사는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방법이 잘못되었단 말입니다! 충격 요법이오? 네, 아주 충격적이죠! 대를 이어 아란제브의 복수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조상신들은 물론이고 선대의 휘파람 부는 자들까지 저승에서 통곡을 하시겠습니다 그려! 즉위 전에 온 대륙을 떠도시더니 대체 어디서 뭘 배워 오신 겝니까, 네? 제 말은 듣고 계신 겁니까, 현왕!?"

그렇게 엘프들이 모두 퇴장하고, 신음하며 경기장을 뒹굴던 상대팀도 들것에 실려 나가는 동안 경기장은 그렇게 침묵에 잠겨 있었다.



  • * *


"어흠!"

의전관이 일부러 목청껏 헛기침을 한 뒤에야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동방의 끝, 하슬라의 왕세자 - '이산'! 그리고 그의 호위무사대!"

"성실과 열정으로 일하겠습니다. - '차가운 유혹' 용병대!"

한쪽에서는 숙취에 시달리는 왕세자의 무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가나 너츠가 소속된 용병대가 마주쳤다. 왕세자가 허리춤의 쌍검을 힘겹게 뽑아들자 용병대의 대장쯤 되어 보이는 덩치가 빈정거렸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간밤에 어디 좋~은 여자라도 안고 오셨습니까. 왕세자 나리?"

"... 닥쳐. 검이나 뽑아라."

"아, 소인들은 천 것들이라 검 같은 귀한 물건은 없는뎁쇼. 대신 이..."

그자는 어깨에 맨 거대한 철퇴를 들어 바닥에 쿵 하고 내리찍었다.

"이 굵은 놈으로 그 고귀한 엉덩이에 한 방 먹여드릴 수는 있습죠."

두통으로 지끈거리던 왕세자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두두둑 하고 돋아났다.

"놈!"

왕세자가 폭풍처럼 튀어나갔다. 의전관이 시작 신호를 내리기도 전이었다. 기세에 놀란 용병대장이 철퇴를 들어 올려 막아내려 했지만 비룡처럼 날아오른 두 자루의 칼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카앙!

왕세자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였다. 어느새 옆으로 파고들어 왕세자의 칼을 방패로 튕겨낸 가나 너츠가, 장총 끝을 왕세자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미안해요."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왕세자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대로 쓰러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튕겨져나갔던 칼을 거꾸로 돌리면서 장총을 쳐낸 것이다. 가나는 실소하며 튕겨져나간 장총을 거뒀다.

"... 만만치 않으시군요?"

왕세자 역시 정신이 들었는지 두 자루의 검으로 자세를 취하며 가나를 노려봤다.

"멈추시오!”

뒤늦은 의전관의 만류.

“아직 시작 신호가 없었잖소! 멈추지 않으면 모두 실격 처리하겠소!”

양 팀은 서로의 시작 라인으로 돌아갔다. 용병대장은 목을 문지르며 가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 뭐야. 샌님 도령이라며? 적당히 도발하면 끝난다더니..."

"미안. 잘못된 정보였나 봐. 끝내고, 정보 판 놈 족치자고."

가나는 어께 너머로 왕세자를 슥 돌아봤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뒤, 칼을 짚은 채 비틀대는 왕세자를 호위 무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 술에 떡이 됐다는 건 맞나 보네. 아니었으면..."

가나는 용병대장에게 방금 전의 장총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 중간은 완전히 갈라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칼로 총대를 쳤는데 온전할 리가 있나 싶던 용병대장은, 문득 가나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보았다.

"...터진거야. 총알이 총구로 나가기도 전에 맞아 총열이 터졌다고. 좀만 더 빨랐으면 총열 대신 약실이 터졌을 걸? 내 손도 온전치는 못했겠지."

굳어버린 용병대장을 뒤로하고 '아아, 아까워라. 잘 나오지도 않는 물건인데.'라고 중얼거리며 가나는 경기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곳에 비치된 예비 무기들을 둘러보더니, 단창 한 자루를 골랐다.

"창은 고향에서 멧돼지 사냥할 때 이후론 거의 안 써 봤는데. 어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을라나?"

"...이길 순 있는 거야?"

심히 불안한 목소리로 용병대장이 묻자 가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운 좋으면?"

"...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래, '차가운 유혹'이 언제부터 정보전으로 우위를 점했다고."

용병대장은 나머지 단원들을 향해 돌아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보여줄 건 실력! 오로지 실력이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 용병단의 다음 의뢰 액수가 정해진다 자식들아, 힘차게 가보자!"

"오옷!"

한 편.

왕세자 이산을 둘러싼 호위 무사들 중 한 명이 베일을 풀자, 그와 똑 닮은 여성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나이는 왕세자 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 야, 괜찮아?"

"... 괜찮다, 수려야. 그리고 너 오라비한테 야가 뭐야 야가..."

"시끄럽고, 경기 가능? 웬만하면 다음을 기약하지?"

"..."

"불가능?"

"...가능."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고, 여자 무사는 베일을 다시 투구에 묶었다.

"복부 단디 챙겨. 또 같은 일 벌어지면 답도 없으니까."

"..."

여자 무사가 일어서서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의전관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와 시작을 알렸다. 5:5로 이루어진 두 팀이 서로의 간격을 보면서 경기장을 뱅뱅 돌기 시작하자, 중앙 관람석에 앉아있던 마리안의 상체도 가나 너츠의 움직임을 쫓아 바쁘게 들썩거렸다. 덩달아 그런 마리안의 거친 움직임을 지켜보는 비고 노르예트의 불안한 눈빛도.

용병대장이 먼저 함성과 함께 그 거구로 지축을 울리며 돌진해왔다. 이쪽에서는 마찬가지로 왕세자가 응수하며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힘에 부치십니까, 전하? 적당히 백기 드시죠?"

"... 육실할 놈."

세자는 쌍검으로 철퇴를 밀어낸 다음 공세로 돌아섰다. 용병대의 후미에서 그런 왕세자를 노린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사이로 뛰어든 여자 무사가 자기 갑옷의 어깨 부분을 이용해 빗겨 맞고, 그 여자 무사의 빈틈을 가나가 노리고 찔렀다. 여자 무사는 들고 있던 언월도로 가나의 창을 거둬내며 그 자세를 이어 도신을 내려찍었다. 가나 역시 방패로 도신을 흘려낸 다음 한쪽 발로 밟아 봉쇄하고 반격을 노렸다. 나머지 호위 무사들 중 둘은 폴암의 용병을 제치며 빠르게 용병대의 마법사를 포위했고, 마법사는 준비해 둔 결계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고는 공격 마법을 외우려는데 추가 영창이 되지 않았다.

"어?"

당황한 마법사의 눈에, 결계 밖에 붙어 팔랑거리는 부적 한 장이 들어왔다. 무사들은 그렇게 자기 결계 안에 갇혀버린 마법사를 등에 진채 승냥이처럼 돌면서, 마법사를 구하려는 폴암의 용병을 견제했다.

활을 든 용병은 상황이 더 나빴다. 그의 상대는 철심 주위에 밧줄을 둘둘 말아 놓은 것 같은 기괴한 방패로 공격을 막다가, 거리가 벌어지면 채찍을 휘두르며 활 쏘는 것을 방해했다. 블랙잭을 들고 덤벼들면 줄행랑을 쳤고, 다른 동료에게 가세라도 할라 치면 다시 채찍이 날아들었다.

"이런 XX!"

힘도 민첩함도 자신이 있었다. 평상시라면 덤벼드는 놈은 블랙잭으로 때려눕히고, 적의 공격은 피하면서 방금 전처럼 동료들의 등 뒤를 책임지는 화살을 날려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가나는 연이은 반격에 언월도를 놓친 여자 무사를 압박하러 파고 들어갔다가, 팔꿈치에 명치를 얻어맞고 물러섰다. 갑옷 너머에, 경기용 보호 마법까지 겹쳐있는데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그냥 맞았으면 죽었을 법한 일격이었다. 여자 무사에게도 꽤 부담이 됐는지 땅에 떨어진 언월도를 걷어 차 쥐고도, 얼굴을 찡그리며 팔꿈치를 날린 쪽 어깨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돌아보니 왕세자는 일격 이탈을 반복하면서 용병대장의 체력을 차근차근 빼 놓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가나의 눈에, 문득 잔뜩 찌푸린 왕세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 해볼까?'

가나는 여자 무사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리를 용병대장의 뒤쪽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적당한 위치다 싶자 보란 듯이 단창으로 방패를 탕탕 쳐댔다.

코웃음을 친 여자 무사는 언월도를 양 어깨 뒤에 걸쳐메더니 몸채로 빙빙 돌리며 접근해 왔다. 그 회전의 어느 찰나에 언월도가 튀어나올지 모를 기술이라 보통은 뒤로 빠지겠지 싶던 여자 무사의 코앞에 가나의 방패가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서둘러 방패를 튕겨냈는데, 그 뒤에 있어야 할 가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나는 방패로 가격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방패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그제서야 주변이 보인 여자 무사의 눈에, 용병 대장을 향해 뛰어드는 왕세자가 보였다. 그리고 가나 역시 용병대장의 큰 덩치를 눈가림 삼아 왕세자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오라비!"

여자 무사의 비명에 왕세자 역시 사태를 깨달았지만, 늦고 말았다. 용병대장의 뒤에서 튀어나온 가나의 단창은 간신히 쳐냈지만, 방패 치는 소리의 뜻을 알아차린 용병대장이 시간차로 휘두른 철퇴가 옆구리를 강타했다. 왕세자는 거의 세 바퀴를 구르며 경기장 한쪽 끝에 처박히더니 '그르륵...'하고 거품 무는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관중이 환성을 질렀다.

'경기용 보호 마법 때문에 죽지야 않겠지만, 숙취로 뒤틀린 속으로는 못 움직일걸. 그동안 남은 상대를 정리하면...'

가나는 볼품없이 땅에 드러누운 채 그렇게 생각했다. 무리한 동작으로 연쇄 공격을 유도한데다 단창을 쳐낸 왕세자의 검이 생각보다 매웠던 것이다.

"방심하지 마. 이제 겨우 한 명...?"

콜록거리며 일어서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왕세자의 무사들이 모두 멈춰 선 것이다. 씩씩대며 상대를 쫓던 궁수 용병은 간신히 멱살을 잡아채고 맨 주먹으로 면상을 갈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세상 끝난 표정으로 왕세자가 쓰러진 쪽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왕세자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우욱!"

...아름다운 토사물이 그 입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형형색색의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 같은 것이 왕세자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면서 발밑으로 퍼져 나갔다. 마침 왕세자가 쓰러진 곳 옆에서 자신의 결계에 갇혀있던 마법사는 간신히 해주식을 완성했지만 자기 발치까지 흘러드는 빛나는 토사물(?)을 보자 기겁하며 결계를 이중으로 쳐 버렸다.

"뭐야? 무슨 마법이야, 저거?"

가나가 여자 무사에게 소리를 지르자, 마찬가지로 그쪽을 멀거니 보고 있던 여자 무사는 투구를 벗어던지며 동대륙 공용어로 중얼거렸다.

"하... XX, X됐네."

그렇게 토사물을 게워내며 왕세자의 몸은 풍선 쪼그라들듯 쪼그라들더니 이윽고 옷가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질척거리는 옷자락 한 쪽을 들추며 나타난 것은....

"...개구리?"

녹색의, 귀엽게 생긴 개구리 한 마리였다.

용병들이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여자 무사는 이를 악문 채 빛나는 토사물 속으로 철벅철벅 걸어들어갔다. 그리고는 개구리를 덥썩 집어 들더니, 다른 쪽 손으로 자기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XX XX. 이걸 북새통에 밟혀 죽으라고 둘 수도 없고..."

그러고는 의전관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항복 선언이었다.

"... 스, 승자! '차가운 유혹' 용병대!"

"... 오? 오오옷, 이겼다?!"

용병대장은 철퇴를 치켜들고 승리의 함성을 질렀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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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자 : 아키위키 @누이 | 1레벨 | 격투의 초심자 | 누이안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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